한국은행 원화 스테이블코인, 은행 중심 발행 선언

원화 스테이블코인 이야기가 나온 지는 꽤 됐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래서 누가 발행하게 되는 건데?”라는 질문에는 명확한 답이 잘 안 나옵니다. 이 글은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지난 몇 달간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 업무보고, 인사청문회 서면답변, 그리고 한국은행이 주최한 국제 콘퍼런스에서 각각 다른 자리에서 했던 발언들을 하나로 엮어봤습니다.

발언 하나하나만 보면 새로울 게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고 나면, 한국은행이 그리는 그림이 꽤 일관되게 반복되고 있다는 게 드러납니다. 그 그림의 핵심은 디지털 화폐 생태계의 중심은 은행이어야 한다로 요약됩니다.

 

2026년 4월, 인사청문회: 위계가 처음으로 명시되다

4월 인사청문회 서면답변에서 신 후보자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이를 토대로 한 상업은행의 예금토큰이 디지털 통화 생태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은 이 구조 안에서 예금토큰과 보완적·경쟁적으로 공존하는 위치로 규정됐습니다. 과거 스테이블코인과 가상자산에 부정적이었던 입장에서 한발 물러선 발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CBDC·예금토큰이 중심이라는 전제는 그대로였습니다.

발행 주체에 대한 언급도 이때 구체화됐습니다. 한국은 미국이나 유럽처럼 기축통화국이 아니기 때문에 자금세탁 방지나 고객 확인 같은 규제 준수 역량이 특히 중요하고, 그래서 “규제 준수 능력이 검증된 은행권 중심 컨소시엄에 비은행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우선 허용한 뒤 점차 확대하자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한국은행이 그동안 견지해온 입장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외환 거래 효율화 주장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블록체인이 자본·외환 규제를 제대로 지킬 수 있을지, 규제 준수 비용이 커질 경우에도 효율성 이득이 남을지 불확실하다는 이유였습니다. 가상자산 전반에 대해서는 화폐의 핵심 기능인 가치 척도, 교환 매개, 가치 저장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원론적 평가를 덧붙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발언 직후 신 후보자의 오랜 친정인 국제결제은행(BIS)이 다소 결이 다른 반응을 내놨다는 것입니다. BIS는 “스테이블코인은 단일성·탄력성·무결성이라는 기준에서 통화 시스템의 핵심 축이 되기 위한 요건에 미치지 못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재확인했습니다. 특정 국가 정책을 직접 겨냥한 발언은 아니었지만, 신 후보자의 다소 전향적인 태도와는 온도차가 있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2026년 6월, BOK 국제콘퍼런스: “기술이 아니라 신뢰”

6월 1일 한국은행이 주최한 국제콘퍼런스 개회사에서 신 총재는 한 발 더 나아간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화폐는 기술이 아니라 경제와 금융 활동을 조정하는 사회적 제도이며, 신뢰는 그 모든 것의 기본”이라는 발언입니다. 스테이블코인이나 CBDC 같은 기술적 논의가 아무리 정교해도, 결국 사람들이 그 화폐를 믿고 쓸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는 취지입니다.

이어진 유럽중앙은행(ECB) 이자벨 슈나벨 집행이사와의 정책대담에서는 훨씬 현실적인 질문이 오갔습니다. 신 총재는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이미 시장을 선점한 상황에서 유로화 스테이블코인조차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사례를 언급하며,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시장에 안착하려면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슈나벨 이사는 네트워크 효과와 규제 설계가 핵심 변수라고 답했습니다.

이 대담이 의미 있는 이유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과제가 “만들 수 있느냐”가 아니라 “만들어도 쓰일 수 있느냐”로 이동했다는 걸 총재 스스로 인정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국경을 넘어 결제·송금에 쓰이고 있는 상황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국내에서조차 충분한 사용처를 확보하지 못하면 제도만 만들어놓고 시장에서 외면받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 발언들이 단순한 원칙론에 그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정황도 있습니다. 콘퍼런스를 전후해 하나금융그룹은 하나은행을 통해 1조 원 넘는 자금을 투입, 가상자산거래소 업비트를 운영하는 두나무 지분 확보에 나섰습니다. 이는 하나은행이 국내에서 단행한 전략적 지분투자 중 역대 최대 규모로 알려졌습니다. 비슷한 시기 KB금융그룹은 NH농협은행, IBK기업은행, BNK부산은행, 경남은행, 토스 등과 디지털자산사업 관련 미팅을 가졌습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컨소시엄 구성을 위한 자리라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한국은행은 2025년 10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스테이블코인은 발행 주체의 신뢰성과 규제 준수 역량이 중요하다”며 “비은행에 발행을 허용하기에 앞서 금산분리 원칙 수정 등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총재의 반복된 발언과 대형 은행지주들의 움직임은 이 보고서가 제시한 방향과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2026년 7월, 국회 업무보고: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

7월 9일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신 총재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관련 입법(디지털자산기본법)에 대한 질의에 “제도를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일부에서 “입장이 바뀐 것 아니냐”고 묻자 “청문회 때 말씀드린 입장과 차이가 없다”고 답했는데, 실제로 이 발언은 4월 청문회 답변, 6월 콘퍼런스 발언과 논리적으로 정확히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는 통화정책 전반에 대한 발언도 이어졌습니다. 지난해 7월 이후 2.5%로 유지해온 기준금리를 물가 오름세, 성장세 개선, 금융안정 리스크 증대를 고려해 적절한 시기에 인상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고, 반도체 수출 호조에 힘입어 올해 성장률 전망치(2.6%)가 상향될 가능성도 열어뒀습니다. 환율에 대해서는 경상수지 흑자 누적을 근거로 원화가 다시 강세로 돌아설 여지가 있다고 봤습니다.

 

은행 중심이어야 하는 세 가지 논리

4월부터 7월까지의 발언을 종합하면 한국은행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은행 중심 발행을 고수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갈래로 정리됩니다.

첫째, 담보 자산의 투명성 문제입니다. 스테이블코인은 발행량만큼 실제 준비금(원화, 국채 등)을 보유하고 있어야 가치가 유지됩니다. 규제와 감독을 받는 은행이 발행 주체가 되면 이 준비금의 존재와 규모를 검증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합니다. 이런 리스크를 설명할 때 흔히 언급되는 테라·루나 사태는 담보 자산 없이 알고리즘으로 가격을 유지하려던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지금 논의되는 법정화폐 담보형 스테이블코인의 리스크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준비금 투명성 논란을 겪었던 달러 스테이블코인 테더 사례가 이 논리에 더 가깝습니다.

둘째, 통화 정책의 실효성 문제입니다. 만약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해외 플랫폼이나 비규제 민간 사업자가 선점하게 되면, 한국은행이 금리를 조정해도 그 효과가 스테이블코인 유통 영역까지 온전히 미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슈나벨 이사와의 대담에서 나온 질문, 즉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이미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원화가 설 자리가 있는가”라는 문제의식도 이 지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셋째, CBDC와의 연계 구조입니다. 한국은행이 추진하는 CBDC는 은행 간 결제에 쓰이는 도매용 성격이 강하고, 일반 국민이 직접 쓰는 돈은 그 아래 단계에서 은행이 발행하는 예금토큰이 맡는 구조로 설계되고 있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은 이 구조에서 예금토큰과 나란히 공존하는 위치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은행이 유통 창구 역할을 해야 이 전체 구조가 작동한다는 논리입니다.

 

정리하며

4월부터 7월까지 이어진 발언을 순서대로 이어붙이고 나면 한 가지는 분명해집니다. 한국은행의 입장은 그때그때 바뀐 게 아니라, 같은 원칙을 다른 자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해온 것에 가깝습니다. 청문회에서는 발행 구조를, 국제 콘퍼런스에서는 신뢰라는 원론을, 국회 업무보고에서는 입법 필요성을 강조했을 뿐, “은행 중심”이라는 축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구도가 그대로 실현될지는 아직 지켜볼 부분이 많습니다. 디지털자산기본법이 실제로 어떤 내용으로 국회를 통과하느냐, 그리고 비은행 사업자들이 이 구도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은행 중심 원칙이 법제화 과정에서 그대로 유지될지, 일부 조정될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공개된 인사청문회 서면답변, 한국은행 국제콘퍼런스 발언, 국회 업무보고 등 언론 보도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며, 특정 자산에 대한 투자 판단이나 조언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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